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나라의 베트남 원정 (문단 편집) === 원나라 군의 반끼엡 철수 === 토곤이 탕롱을 포위하는 동안, 원나라의 장수들은 지시에 따라 점거된 반끼엡의 방비와 시설 등을 강화하였으나 여러 군데에 지어놓은 기지들이 매번 쩐군의 기습에 무너지거나 고립되는 일이 빈번했다. 초조해진 토곤은 1288년 2월 10일에 장문호가 이끄는 보급선이 무사히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자신에게 합류한 우마르에게 장문호의 함선이 어디쯤 도착했는지 확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우마르의 별동대는 반욱강(炆墺江)에서 습격을 당했다. 피해를 감수하고선 어찌어찌 탑산 일대까지 나아갔으나 이미 패배해 버린 장문호의 함선을 당연히 볼 수 없었고 결국 아무런 소득 없이 반끼엡으로 복귀했다. 돌아가는 길에 우마르의 부대는 인근을 약탈해서 4만 석의 식량을 얻었고 또 다른 원의 장수 아바키 역시 탑산에서 쩐의 군대와 교전을 치른 뒤 1만석에서 3만석 정도의 식량을 약탈하는데 성공했으나 그것으로 많은 수의 원나라 군사들을 먹이는 것은 택도 없었다. 식량이 바닥나기 시작하자 탈영병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기회를 잡은 쩐군은 거센 반격을 가해 그 주변 지역의 도로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토곤의 군대와 반끼엡 사이의 연결이 끊어졌고 결국 토곤은 탕롱에서 병력을 철수시킨 뒤, 아바키를 앞장 세워 길을 연 뒤 반끼엡으로 퇴각했다. 원나라 군이 다이 비엣에 진입한 지 약 4개월이 지나는 1288년 3월 말까지 식량은 부족하고 날씨가 봄에서 여름으로 바뀌고 있었던 탓에 풍토병이 발생했다. 그로 인해 기껏 점령한 지역을 전부 버리다보니 원군의 주둔지는 반끼엡과 그 주변지로 축소되었다. 이런 원나라 군의 기운을 더 빼기 위해서 쩐 구옥뚜안은 속임수를 쓰기로 했다. 이전에 사신으로 보냈던 [[여수장우중문시|쩐 까오를 다시 보내 '청항(請降)', 즉 항복을 청한다는 뜻을 보냈다]]. 이미 지쳐 있었던 토곤은 그 말을 믿고는 병력을 요새 안에 주둔시키면서 망가진 시설을 수리하게 했고 쩐 구옥뚜안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평소라면 이런 계책에 넘어가지도 않았겠지만 그만큼 토곤과 원나라 병사들은 굶주림과 풍토병, 그리고 피로에 지쳐있었다.] 이렇게 원나라 군이 지쳐서 방심하고 있을 때 쩐의 군사들이 다시금 야습을 감행하자 토곤은 그제야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크게 분노해 장수 호지아이찬(戶解震)에게 다시 한 번 병력을 모아 공격하고 쩐군의 요새를 불태우며 보이는 족족 모두 죽이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휘하의 장수들은 지금 돌격하면 전부 다 죽자는 것 밖에 안된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분노로 이성의 끈을 반쯤 놓아버린 총사령관을 진정시키고 지금 내린 명령을 취소하도록 설득했다. 한편, 반끼엡 역시 안전한 목책 뒤에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쩐 군대의 야습에 수시로 시달려야만 했다. 게다가 탕롱을 공격하던 부대와 마찬가지로 이 곳도 식량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결국 원나라의 장수들은 모여서 작전을 논의했다. 이 당시 상황을 묘사한 「신원사(新元史)」에는 "군대가 돌아오더라도 버틸 수 없다","교지에는 지킬 수 있는 요새도 식량도 없었으며 날씨가 더워 식량이 빠르게 상해 오래 머무를 수 없어 얼굴에 병색이 짙은 군대는 결국 돌아왔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결국 원나라가 세 번째로 다이 비엣을 공격한 지 고작 3개월 밖에 안 된 1288년 3월 말, 토곤은 다이 비엣에서 철군하기로 결정했다. 철군하는 원나라 군은 두 갈래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우마르와 반섭이 지휘했고 나머지 한 갈래는 토곤이 직접 지휘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